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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현판 발굴

한국교육개발원 초기 현판 발굴에 관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게시 합니다.

초기 현판

한국교육개발원 초기 현판 이미지

한국교육개발원 초기 현판 발굴 이야기

필자가 한국교육개발원에 근무하던 1980년대 중반부터 뜻이 맞는 몇 사람(윤양희, 정하원, 김영우, 임선하)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근처의 화랑과 고서점을 다니면서 감식안을 키웠다. 이후 필자는 교육박물관 설립을 꿈꾸면서 교육 관련 자료를 수집해오고 있다. 힘껏 노력한 결과 지금은 3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게 되었고, 조만간 교육박물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이런 인연을 가진 김영우 선생과 나는 둘 다 비록 한국교육개발원을 떠났지만 가끔씩 연락을 주고 받는 관계였다. 평소 건강하던 그였지만 재작년 겨울 급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손때가 묻은 수집품들은 여기 저기 흩어지게 되었다.

얼마 전 사모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품을 다 정리했는 줄 알았는데, 집안 어느 반닫이 속에 그림과 글씨가 들어 있더라면서 시간이 나면 들러 감정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마침 율곡연수원에서 강의가 있어 멀지 않은 일산의 집에 들렀다. 반닫이를 열고 보니 족히 100여 점은 넘어 보이는 그림과 글씨가 둘둘 말린 채 쌓여 있었다.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작가의 이름과 시장 가격을 알려드리다 한국교육개발원 초기 현판 글씨를 발견하였다. 한글로 한국교육개발원을 내려서 쓰고, 서봉 김사달 기미하절(西峰 金思達 己未夏節)이라 낙관하였다. 그리고 작은 글씨로 현판 제작용 원본이라고 써 있었다. 교육자이면서 의사인 서예가 김사달 선생이 1979년 여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현판 제작용 원본이라 하면 그것을 현판 제작용 판(주로 나무 재질)에 부착하고, 글씨를 새기는 용도이기 때문에 원본이 남아 있기는 어렵다. 추측컨대 원본을 복사하여 현판 제작에 활용하고, 원본은 남겨두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때 남겨진 원본이 어떤 경로를 거쳐 김영우 동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당시의 분위기로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이 자료를 그가 입수하여 지금까지 고이 간직해 왔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한국교육개발원 정문에 부착되어 있는 현판과는 다른 글씨체를 가진 김사달 글씨의 현판은 분명히 첫 번째 현판은 아닐 것이다. 1972년 8월에 설립된 한국교육개발원은 설립 초기부터 그 위상이 매우 높았다. 1978년에 이미 영국 브리태니커사가 선정한 세계 10대 교육연구기관에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 당시의 저명인이 쓴 현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초의 현판이 존재했었는지, 존재했다면 누가 썼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번에 발굴된 현판은 비록 현판 제작용 원본이기는 하지만 한국교육개발원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 원본을 이용해 새롭게 현판을 제작하여 보존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현판 글씨를 쓴 김사달 선생과 관련하여 몇 가지 생각을 해본다. 1979년에 최고로 잘 나가던 기관에서 당대의 최고 서예가가 아닌 그에게 현판 글씨를 의뢰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비록 그는 서예가로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그의 스승 손재형, 명필 가문의 김응현, 김충현 형제, 그리고 동문 수학한 서희환과 김기승의 글씨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는 서예가로서보다는 독학으로 의사가 된 사람이나 수필가라는 칭호가 더 어울린 사람이었다. 이런 그의 이력이 가난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교육에 운명을 걸었던, 당시 원장이었던 이영덕 박사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현재 한국교육개발원에는 이번에 발굴된 현판 외에 그가 쓴 두 점의 작품이 더 있다. 하나는 제1회의실에 있는 굴원의 시 글씨이며, 다른 하나는 도서실에 있는 국민교육헌장 글씨이다.

필자는 한국교육개발원에서 13년 동안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현재는 현대창의성연구소 소장으로 일하면서 교육박물관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 초기 현판은 첨부파일을 참고하시기 바라며, 기타 사용 관련 문의는 대외협력단 홍보자료실 (043-5309-236)으로 문의바랍니다.